백수일기(1)-백수생활의 첫 단추가 뒤틀리다(?) 백수일기

수련을 마치고 무조건 1년은 쉴 계획이었다. 
인턴과 전공의, 도합 5년에 달하는 체험 삶의 현장 [극한직업편]을 겪고 난 이후 내 몸과 마음은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핸드폰 벨소리를 들으면 심박수와 함께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고, 동시에 위산도 같이 입으로 꾸역꾸역 치밀어 올랐다. 파릇파릇한 호기심과 순수한 학구열을 가지고 실습을 도는 의대생들을 보며 '곧 있으면 너희들도 웰컴 투 헬이야' 를 되뇌이며 비뚤어진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쉬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결혼 전부터 남편에게 수련이 끝나면 무조건 1년을 쉬겠다고 선언했고, 덕분에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었다.
전문의 시험이 끝나고난 뒤, 1년간 뭐 하고 놀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여러 계획을 짜고 있었다. 영어 학원도 다니고 싶고, 메이크업 레슨도 받고 싶었다. 이미 4월달에는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유럽여행도 계획되어 있었다. 틈날때마다 남편과 여기저기 다니면서 전공의 생활동안 제대로 못했던 신혼도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방치했던 포스팅도 다시 하고 싶었다. 고양이도 키우고 싶었다.

그러던 1월의 어느날.
몸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스트를 해보니...... 임신이었다. 이유없이 기뻤고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처음에는 멍~하게 있다가 delayed로 기뻐하기 시작했다. 빨리 병원에 가자고 재촉하는 그를 "어차피 지금 가봤자 아직 주수가 안되어서 초음파로는 안보여"라고 응수하며 말렸다. 그와 동시에 수 많은 잔소리를 가장한 걱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잔소리들은 초음파로 아기를 확인한 다음부터 더욱 더 심해졌으나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였기에 마냥 좋기만 했다. 커피는 무조건 안된다는 잔소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커피 한잔은 괜찮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의사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나의 출퇴근. 아침 여섯시에 용인에서 강남까지 40분가량 운전해서 출근을 해야 했다. 한달 정도만 더 근무하면 전공의 수련이 종료되기 때문에 더 이상 출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남편에게 1달동안 조심히 운전하겠다고 다짐했다. 힘들다고 남편에게 출퇴근 시켜달라고 할 수 는 없는 노릇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출근만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두 번째 문제는 당직문제다.
주 80시간에 맞춰 스케줄을 짜야 하기 때문에 4년차들도 전문의 시험을 치고 나서 당직을 서야 했다. 다행히 의국장이 4년차들을 밤새도록 병동 콜을 받아야 하는 병동 당직이 아닌 응급 수술만 들어가는 수술 당직으로 배치했다. 수술당직은 로또와 같아서 수술이 없는 날은 당직실에서 대기만 하고 있으면 되지만, 응급수술이나 이식수술이 있는 날은 밤을 샐 수도 있다. 임신했다고 당직을 빼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항상 사람이 부족한 과가 외과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당직인 날은 응급수술이 항상 저녁에 열려서 자정 전에는 다 끝났다. 의국장은 본인이 병동 당직인 날에는 밤늦게 수술이 열리면 대신 들어오겠다고 해 주었다. 한번은 밤 늦게 수술이 열렸으나 그날 당직 교수님이 간단한 수술이라며 수술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배려해 주셨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다. 뱃속의 아기가 도와준 듯 했다. 

세 번째 문제는 입덧이었다. 
임신 6주차부터 입덧이 시작되었다. 배고프고 입맛이 있어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움직이기 위해 밥을 조금씩만 먹었다. 보다못한 남편이 매일 과일 도시락을 싸줬다. 그리고 입덧은 병원을 그만두고 나니 더 심해졌다. 

네 번째 문제는 환자 나르기.
수술이 끝난 후 마취에서 갓 깨어난 환자는 혼자 힘으로 수술대에서 환자 이송용 스트레쳐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최소한 3명 이상의 사람이 들어서 옮겨야 한다. 환자가 비만이면 더 힘들다. 남편이 임신하면 무거운 것을 들면 안되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도 간단히 해결되었다. 수술방 간호사에게 임신했다고 이야기 하니 환자를 옮겨야 하는 타이밍에 "선생님은 뒤로 빠져요!"라며 열외를 시켜줬다. 

임신하고도 직장에 계속 나가는 내 친구를 생각하면 한달 정도만 잘 지내면 백수가 될 수 있는 나는 복 받은 셈이다.
그래서 조심조심하며 지내던 어느날...... 아침에 유난히 배가 아팠다. 어쨌든 출근해서 아침에 수술방을 들어가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수술방 간호사에게 산부인과 진료를 보러 간다고 이야기하고 바로 외래로 내려갔다. 수술복에 가운을 걸쳐 입고 내려온 내 모습을 보고 산부인과 교수님이 어느 과 냐고 물어보셔서 외과4년차라고 했다.  

"4년차 올라가요?"
"아니요..... 이번에 보드 땄어요....."

그러자 교수님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절박유산"이라는 진단서를 떼주며 입원을 하던지 집에서 절대안정을 취하라고 하셨고, 난 원래 다니는 병원이 있으니 거기서 추적관찰 하겠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섰다. 

그리고 외과 교수님들께 사정을 말씀드리니 오늘부터 병원에 나오지 말라며 푹 쉬라고 하신다. 
그 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고 우리 파트 아랫년차선생님과 펠로우 선생님들께도 사정을 이야기 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한 뒤 당직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난 후 남편은 회사일을 대충 마무리를 하고 오는건지 잘 모르겠으나...... 허겁지겁 수원에서 차를 끌고 날 데리러 당직실로 왔다. 그대로 집으로 끌려간 나는 절대안정모드로 들어갔다. 

결론적으로 우리 아가님 덕분에 동기들보다 병원을 조금 더 빨리 그만두고 나올 수 있었으나, ABR (absolute bed rest,절대안정) 모드로 들어가야 했던 덕분에 병원을 그만두면 하려고 했던 일들은 전부다 보류가 되어 버렸다. 백수생활의 첫 단추가 어긋난 셈이다. 그리고 그 뒤에 했던 초음파에서도 피가 고인게 보인다고 해서 ABR모드는 한동안 지속되었고, 그 후에 심한 입덧으로 몸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덕분에 비의료인인 우리 남편도 "ABR"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유럽여행 가기로 한 날짜가 임신 안정기에 해당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기 들어간 예약금이 얼만데......



덧글

  • EM R2 2017/06/12 21:54 # 삭제 답글

    고생하셨네요. 푹 쉬세요.
  • 동굴아저씨 2017/06/12 22:40 # 답글

    임신 축하드립니다.
  • 명품추리닝 2017/06/12 22:48 # 답글

    임신 축하드려요. 건강하고 예쁜 아기 낳으시길.
  • 위장효과 2017/06/12 23:23 # 답글

    Threatened Abortion이라니...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구만...(이게 외과의사의 숙명인가...)

    덤으로...그나마 남자들은 군대-특히나 공보의-라는 숨돌릴 구녕이 있지만 여자들은 그런 것도 없으니.
  • 2017/06/12 23: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irabell 2017/06/13 01:50 # 답글

    위험할뻔 헀네요;; 계획한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으셨지만.. 더 큰 소중한 일을 살릴 수 있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 고생하셨습니다 ~
  • 2017/06/13 14:3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마언니 2017/06/15 23:57 # 답글

    아이고......정말 힘든데, 푹 쉬시고 지금쯤 유럽에서 룰루랄라하고 계신 것이시길
  • 여울 2017/06/16 02:34 # 삭제 답글

    항상 잘읽고 있었는데 깜짝 소식을 받았네요!! 임신 축하드려요ㅎㅎ의사시니까 건강은 저보다 더 잘아실테지만 푹 쉬시고 절대안정!♡
  • ... 2017/06/17 20:26 # 삭제

    ...유산;;;;
  • 2017/06/17 22:58 # 삭제 답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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