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연기력 잡설 의과대학

최근들어 필자는 비 전공분야인 "연기"에 심취하고 있다. 나의 연기력은 날이 갈 수록 일취월장하고 있어 오스카상 "환자 부분" 이 신설된다면 당장이라도 상을 받을 정도로 수준급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의과대학생인 필자가 학교에서 전공과는 관계없는 연기를 해야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의과대학 6년 교육의 최종목표인 (?) 국시 때문.

2년전부터 도입된 의사국가고시 실기시험은 크게 CPX와 OSCE(이하 오슥히)로 구성되어 있다.
CPX는 잘 훈련된 모의환자를 앉혀 놓고 과거력 청휘 및 각종 이학적 검사 등을 하여 어떻게 진단에 접근해 나가는지 보는 과목, 그러니까 진료실에서 제대로 진료를 보는지 보는 시험이다.  OSCE는 인체 모형을 갖다 놓고 병원에서 흔히 하는 술기들, 예들들면 상처 봉합이라던가 콧줄 넣기 등을 제대로 하는지 보는 시험이다. 필자의 학교는 학생수가 적은지라 이런 시험을 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데, 바야흐로 요즘은 4주간의 CPX/OSCE실습기간인 것이다.
 

                                                                            (CPX 모식도)

요즘 연습중인 CPX는 국시원에서 40여개가 넘는 항목을 미리 공개하는데 그 항목을 몇가지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나쁜 소식전하기
2. 소변에서 피가 나와요(혈뇨)
3. 목 아파요 (목통증)
4. 자꾸 멍이 들어요
5. 변비
6. 설사          
.............등등등

한 항목을 시험보는데 주어진 시간은 10분이며, 각 질환 당 물어봐야 하는 질문의 갯수는 꽤 많은 편이지만 연습하고 나면 수 많은 질문을 뭉터기로 빼 먹고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저질스러운 두뇌의 기능을 한탄하게 된다. 가슴이 아프다는 환자에게 이전에 먹었던 약이나 이전에 앓았던 질환은 물어봐놓고 정작 가슴이 어떻게 아픈지, 얼마동안 아팠는지 물어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고, 혈압이 높다는 환자에게 혈압을 측정하는데 정작 혈압기 스위치를 off로 돌려놓고 혈압을 측정해서 망신살을 뻗힌 일이 있었다. 어떤 교수님은 최첨단 IT의 상징인 사과폰의 녹화기능을 이용하여 우리가 하는 삽질들을 녹화해 두었다가 보여주셨는데 그 순간 내 손발은 한 없이 오그라 들고 있었다. 나의 의과대학 5년 생활이 그저 허무한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들이 하루에도 여러번씩 일어났다.

원칙대로라면 훈련된 모의환자인 SP를 데려다 놓고 연습을 해야 하지만 하루에 12개의 방을 열어놓는다면 12명의 SP를 대동해야 하는데 일반인(대개 연극배우)을 데려다 놓고 트레이닝 시켜야 하는 기간이나 비용이 꽤 든다고 한다. 하루 일당 5만원 잡고 12명을 2주동안 고용한다면 인건비만 수백만원은 나올 듯 하다. 그래서 일부 는 SP를 쓰지만 거의 대부분은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의환자는 누가 되는가 하면...

1. 학생(가장 흔함)
2. 전공의(흔하지는 않다)
3. 교수님 자신

이 되는데 가장 흔한 것은 학생 두명이 들어가서 번갈아 가며 의사/환자를 하는 것이다.
덕분에 2주간의 기간동안 나는

1) 30년 넘게 술을 먹다가 술을 끊기 위해 정신과를 방문한 56세 회사원 남자
2)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하는 한 젊은 처자
3) 대장암에 걸린 70세 할머니
4) 하교길에 친구들과 떡볶이 먹다가 배탈단 여중생
5) 비염환자
6) 대상포진에 걸린 한 젊은 간호사
7) 출장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린 학교 선생님
8) 취직 면접보다가 숨쉬기 어렵다고 응급실로 온 취업준비생

등등의 환자역할을 연기했고, 그 중 (1)번사례에서는 정신과 교수님으로부터 사이코 패스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모의환자의 인생과 고통을 연기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이제부터 저를 배우 카이라고 불러주시길! (?)

덧) 더운날씨 때문에 슬슬 정신줄 놓고 있는 중.

덧글

  • 라쿤J 2011/06/17 19:23 # 답글

    저 아는 형님이 이거에서 무언가가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 했었죠


    "아니 이게 무슨소리요..."
    (이하 생략.)
  • 카이 2011/06/17 19:29 #

    아니 이게 무슨소리요 너굴양반!
  • 레이니스 2011/06/17 19:29 # 삭제 답글

    데뷔하셔요! 헐리우드도 문제 없습니다!
  • 카이 2011/06/17 19:34 #

    헐리우드 정복은 식은죽 먹기이나, 저는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이 더 큽니다. (?)
  • 커티군 2011/06/17 19:50 # 답글

    교수님이 환자면..."환자님은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습니까?" 소리가 절로 나오겠는걸요...
  • 카이 2011/06/17 20:01 #

    환자님이라는 단어는 안씁니다 고갱님 ㅋㅋ
  • 동굴아저씨 2011/06/17 21:07 # 답글

    오오...배탈난 여중생...
  • 카이 2011/06/17 23:37 #

    지금 무슨 상상을 하시는 겁니까.ㅋㅋ
  • MAC 2011/06/17 22:43 # 답글

    본문도 본문이지만 ㅋㅋㅋㅋ
    환자님과 고갱님에서 뿜었습니다ㅋㅋㅋ
  • 카이 2011/06/17 23:37 #

    센스가 넘치는 이글루스 회원님들 되시겠습니다. 고갱님.
  • 네비아찌 2011/06/17 22:59 # 답글

    저도 이번주부터 정신과 도는 PK 쌤들한테 CPX 실습 시켜주고 있는데
    제가 직접 불면증 모의환자를 연기해보니까 참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 카이 2011/06/17 23:38 #

    나중에는 은근히 연기에 심취를...^^;;
  • 교주님 2011/06/18 00:06 # 답글

    30년 넘게 술을 먹다가...혹시 빙의?? or (dissociative disorder?)

    그나저나, 항목중에 나쁜 소식 전하기도 있다니 놀랐네요. How to tell the bad news라...
    이건 어떻게 대비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너 님에게 할 말 있음..너 님 암임..ㅇㅋ?" 이런식은 아니겠고...(-_-;)

    오숙희, or 숙희씨는 그나마 연습하면 되는데, CPX는 정말...꼭 한 두 개씩 잊어서 문제...
    (저도 CPX는 학교에서 모의 실습을 했습니다. 비록 국시시험에는 아직 없었지만..)
  • 카이 2011/06/18 11:25 #

    제 나이 27세이니 30년 넘게 술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나쁜 소식 전하기는 온갖 위로와 정서적 지지를 하면서 "당신은 암 말기오. 같이 치료해나갑시다"라는 메세지를 전하면 됩니다.ㅋㅋ
  • 콩콩 2011/06/18 02:34 # 답글

    의사되려면 연기도 공부해야 하는군요-
    4학년이라 많이 바쁘실듯 ㅎ
  • 카이 2011/06/18 11:28 #

    오히려 널럴합니다. (저희학교는)
  • 위장효과 2011/06/18 08:56 # 답글

    옛날 옛적 정신과 교재 중에는-과 내 자체 제작-각각 환자들의 가장 특징적인 증상들을 비디오 촬영해놓은 것도 있었는데....

    거기서 환자 역할 하는 게 간호사와 의사, 심지어 작년도 실습돈 선배들까지...

    증상공부는 안하고 누가 과연 리얼하게 하나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중 제일 좋은 교재라면 역시 밀로스 포먼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카이 2011/06/18 11:29 #

    그 영화는 예과 때 단체로 본 적이 있습니다.ㅋㅋ
    어떤상황이던 리얼하게 연기하고 평가하는 것은 역시 본성인가요 ㅋㅋ
  • 네비아찌 2011/06/18 12:27 #

    저희 의국에 PK교육용으로 남아있는 환자 면담기법 VCR 테입이 있는데
    거기서 조증 환자 연기하신 분이 지금 모 정신과 병원 원장님 ㅋㅋㅋ
    그니까 20년 묵은 테입이란 말이죠,^^
  • 카이 2011/06/18 12:41 #

    모의환자 비디오촬영의 역사와 전통(?)은 정신과에서 시작되는군요!
  • 칼스루헤 2011/06/18 23:37 # 답글

    환자연기를 하다 진정 환자가 되면 아니되오이다(..)

    상기는 농이고'ㅅ');;
    의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걸 배우고 있네요.
    사실 실제 환자라던가 상황에 맞게 대처 잘 못하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신들린 연기력을 보여주는걸로 봐서는 환자가 안심할 수 있는 의사가
    되리라고 믿슙니다'ㅂ'!
  • 카이 2011/06/19 10:16 #

    저도 그런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ㅋ
  • googlybear 2011/06/29 10:26 # 답글

    56세 회사원에 풉하다가 싸이코 패스에 빵터졌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인 다역 완벽 소화 가능하시네요 나중엔 환자역할 의사역할 왔다갔다하며 하실 것 같다는^^
    블로그 완~~전 재미있어요!!!
  • 카이 2011/06/29 20:11 #

    감사합니다^^
  • 펜시브 2011/09/06 01:09 # 삭제 답글

    수고 많으십니다.
    트랙백 달고 갑니다... ㅋㅋ

    전 11월11일로 잡혔는데..너무 늦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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