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아우슈비츠에서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바다건너 동쪽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루타", "731부대", 소설 "뺑끼통"으로 잘 알려져 있는 "731부대이다.
731부대는 2차 세계대전때 창설되어, 이시이 중장을 중심으로 세균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히 페스트, 탄저, 콜레라와 같이 치사율이나 전염성이 높고 치명적인 세균을 연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수행을 위해 독가스나 악명높은 동사실험도 진행하였다.
이들이 이용한 마루타는 주로 한국, 중국, 미국인 포로였고, 1936년~1945년사이 9년이라는 기간동안 최소한 3000~4000명의 마루타가 동원되었다. 731부대의 특수 연구동인 7,8동에서 생체시험을 하였고 하루 1~2명의 마루타를 해부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931년 : 일본군 만주침공
-1933년 : 중국 하얼빈에 이시이시로 방역연구소 설립 : 8개부와 1개의 특별반(감옥관리) 설치
-1936년 : 조직 은폐를 위해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편입
-1940년 : 731부대 확대 개편 : 하얼빈 731부대가 중심적인 역할을 함
-1936년 : 장춘 만주 제 100세균 부대 인원 800명
-1939년 : 남경 1644 대마부대 인원 1,500명
-1939년 : 광주 8604 세균부대 설립
-1940년 : 10월 중국 영파시 731부대 세균폭탄으로 99명사망
-1941년 : 11월 중국 창태시 731부대 세균폭탄으로 700명사망
그렇다.... 이분들은 731부대의 지점(Branch)도 몇개 내었고, 실제로 몇몇 도시에서 실험까지 했었던 것이다.
여기서 행해진 실험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세균실험
2) 독가스 실험
3) 혈액량 측정
4) 활체해부 : 무마취, 세균효과 확인
5) 동상실험
6) 세균생산
7) 세균무기 제작
물론 많은 의사가 731부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이들의 인체실험에 대한 태도는 독일과는 달랐다.
독일 의료진들은 한마디로 "스스로" 참여한 것이었지만, 이들은 국가의 생각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여 개인의 비판의식이나 양심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이와 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고 잘한 짓은 아니다.)
종전후 독일 아우슈비츠 연구진은 전범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패전후 자신들의 데이터를 미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전원 불기소 처분된다. 덕분에 총 책임자였던 아사히 시로를 비롯하여 수많은 의학, 수의학, 생물학 관련 연구원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세계 각국의 연구소로 진출하고나 일본으로 돌아와 산부인과의사, 의과대학교수 등으로 활약하여 일본의 의학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패전국이었던 일본이 어떻게 높은 수준의 의학발전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답이 되겠다.
731부대는 아우슈비츠보다 연구 규모 자체는 작았지만 (피험자 수만 놓고 볼 때), 알뜰하게(?) 실험을 한 듯하다.
패전후 모든 자료가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출판된 생리학, 미생물학 교과서의 페이지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미국 및 여러 나라의 의대생 및 생리학을 공부해야 하는 많은 학생들의 원성을 샀다고 하니...... -_-;; (특히 생리학) 필자도 기초의학 중 생리학시험볼때가 제일 후달렸었다.
인체의 수분이 70%정도라는 데이터와, 인체의 혈액량에 대한 치수 등 인체에 관한 여러 "수치"가 상당수 이 곳에서 나왔으며, 만주벌판에서 행한 동상연구는 훗날, 동상의 치료방침을 정하는데 있어서 기본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ps. 학교 발표때문에 마지막회는 주말에 올리겠습니다.^^
ps. 댓글 makes me happy.ㅋㅋ
- 2010/03/23 19:23
- kaine.egloos.com/3187093
- 덧글수 : 22
덧글
러시아와 만주에서 충돌하게 될 경우 혹한지에서의 생존법이 가장 중요하리라 예측한 일본 군부가 1902년 당시 아모모리에 주둔중이던 5연대하고 31연대를 동원해서 혹한기 행군 훈련을 시행했는데, 5연대의 경우 210명중 199명이 사망한 최악의 참사를 빚어냈지요. 보급문제, 지휘관의 만용과 고집, 장비문제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온 게 그 참사.(그래서 지금도 아오모리 주둔중인 일본 육자대 제 5 연대는 겨울만 되면 그 때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혹한기훈련을 한다던데)
감사합니다.^^v
731부대에서 이 것말고도 인체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많이 내놓았었죠..^^;
이런 생각이 드네요...
결국 미국은 가만히 있다가 득본격...?
그래도 결국 미국이 다가졌군요 ㅋ
재미있게 잘 읽었어용~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ㅋ
듣기로는, 731부대 애들은 실험자료랑 목숨을 바꿔서 전범재판에 안 넘어가고 전후에도 잘 살았다던데....총책임자 이시이 시로도 처벌을 안 받은 걸로 알고 있고요.
견학간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잔인함에 치를 떨고 왔지요 ㅜㅜ
그런데 실험결과에 대해서 제가 예전에 봤던 거랑 좀 평가가 틀리네요. 동물실험 자료와도 별로 안 다르고 실험 자체가 엉터리가 많아서 거의 가치가 없었다고 하던데;;
(출처 엔하위키입니다 http://nang01.cafe24.com/wiki/wiki.php/%EC%9D%B4%EC%8B%9C%EC%9D%B4%20%EC%8B%9C%EB%A1%9C)
만약 실험자체가 엉터리라고 했어도 그것 또한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실험 모델이 엉터리라서 제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후대의 다른 연구자는 그 모델의 잘못된 점을 수정하여 다시 실험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죠.
위 사건들중 실험의 많은 부분이 삽질에 가까웠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래도 이들이 의학발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뭐, 당시 세균학적 연구에서는 일본이 가장 앞서 있었으니, 米국에서도 좋은 자료를 받고 면죄처리..
(정로환을 비롯한 몇몇 의약품들이 이때-러일,청일전쟁과 그 이후-의 성과물이지요.)
생각나네요...
31가지의 실험을 했다고 하는대 실험장면은 정말 끔찍했죠...
제일 잔인한 실험이 아마 생체해부였는대 실험을 끝낸 마루타는 결과를 알아보기위해 해부실로 끌고가서 마취없이 산채로해부시켜서 척출된장기는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져
병리연구팀에 보낸후 표본으로 보존하고 해부된 마루타는 소각장에 태워졌죠...
정말 인간으로써 할짓인지 아직도 치를 떨게하네요...
나이토 료이치라는 사람이었죠.... 731부대가 해체되고난후 평방회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당시 실험.연구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의과대학 부장이나 제약회사를 설립 및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죠;;;